Monday, May 26, 2014

바른 길은 어디일까?

Which way is the right way?
John 14:1-14

저는 오늘 John 14:6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을 중심으로 교우님들과 함께 바른 길이 어디인지를 찾아보고 싶습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시골의 작은 마을을 방문해서 부흥집회를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편지를 보낼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지나던 소년에게 우체국을 물었보았고, 소년에게 감사의 말을 하면서 “내가 오늘 저녁 교회에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는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는데 와서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I don’t think I’ll be there. You don’t even know your way how to the post office.” 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말에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충격을 받고, 깊은 묵상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정말 내가 가는 길이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는 것인지, 그리고 교우들을 인도하는 것인지 자성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매우 한정적입니다. 한정적인 삶을 살면서도 매순간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은 매일매일의 선택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택을 통해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처음 우리의 삶은 단순했습니다. 창세기 2:8절 이하에 보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삶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은 바른 길을 아는 것이고, 바른 길을 가게 됨으로 우리의 운명에 도달하게 만듭니다. 내가 가는 곳에는 수백개, 수천개의 길이 있습니다. 어떤 길이 바른 길이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사실 어떤 길이 바른 길인지 모르면서 길을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길을 가면 갈수록 삶이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마치 “경우의 수”를 찾아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개의 길이 두 갈래 나뉘면 네 갈래의 길이 되고 또 둘로 나뉘면 여덟개의 길로 만들어집니다. 또 둘로 나뉘면 열여섯개, 서른 두개… 가면 갈수록 복잡해지고 어려워집니다. 그러다 길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이 모습이 나의 삶이라고 생각해보신 적이 없으신가요?

지금까지의 인간의 경험, 철학, 믿음이 찾고자 했던 명제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죽음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어느 길이 옳은 길인가?”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시작은 우리의 어린 시절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의 전통, 사회전통, 그리고 각자가 가진 종교적 배경으로부터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를 찾게 됩니다. 

성장하면서 우리의 시야는 점점 넓어지고, 사회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복잡한 삶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동시에 복잡한 삶은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우리가 복잡한 삶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동안 우리는 점점 하느님의 생각에서 멀어진 삶을 살게 됩니다. 

"For my thoughts are not your thoughts, neither are your ways my ways," declares the LORD. (Isaiah 55: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우리의 목적지가 “영원한 하늘나라”라고 한다면, 누가 우리를 거기에 가장 잘 데려다 줄까요?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All roads lead to Rome.” 내가가지고 있는 종교관, 생활관, 가치관이 이 말과 다를까요? “모든 길은 하느님으로 통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지 않는가요? 이런 가치관, 신앙관이 나를 하느님으로 인도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다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 뿐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이 단순한 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세상을 변화시켰고, 이웃을 변화시켰고, 나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Do to others as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Luke 6:31)(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Love your enemies.(Matt 5:44)(원수를 사랑하라)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지 종교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삶에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열쇠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욱 그를 갈망하는 것이고, 그와 함께 하는 경험을 갖는 것입니다.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예수님은 자신을 “the only way.”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영원한 하늘나라를 향한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을 향한 여정은 개인의 여정입니다. 나의 여정입니다. 어떤 원칙도 아니고, 연습도 아니고, 처세술도 아닙니다. 철학이나 이념도 아닙니다. 이 여정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말로 하느님의 이름을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Yahweh”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to be” 또는 “the self-existing one” 예수님은 이 이름을 가르켜, “Salvation is found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to men by which we must be saved” (Acts 4:12).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이 말씀을 믿었고, 이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I am come that (men) may have life, and that they may have it more abundantly”(John 10:10)(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높고 귀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삶은 연합이고, 죽음은 분리입니다. 사람은 육신과 영혼, 두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은 이 둘을 처음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작업입니다. “티끌로 된 몸은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아가고 숨은 하느님께 받은 것이니 하느님께로 돌아가리라.”(전도 12:7) 육신의 죽음은 먼지가 되어 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은 하느님과 함께 연합하게 됩니다. 반대로 영적인 죽음은 하느님과 분리되는 것을 말하고, 그 결과는 어둠과 절망속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 것이다.”(마태 25:46)

에던 동산의 삶에서 이미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죄의 죽음으로, 사탄의 발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구원자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탄의 유혹에 현혹되는 삶을 살고 있지만, 예수님은 이를 돌이키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죽음에 놓여 있지만, 예수님은 부활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타입의 교우님들이 여기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줄여서 세 가지로 말씀드립니다. 충분히 내 삶을 내가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우님, 내가 지금 가진 것으로 충분히 내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우님, 마지막으로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은혜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우님. 어떤 교우님이신가요?

예수님은 마태 7장에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정의로 된 좁은 길이고 둘째는 인간의 정의로 된 넓은 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은 어떤 길로 갈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산상수훈의 핵심은 아주 분명합니다. 사상누각을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누각이지만 바람이 불면 곧 무너지는 것과 같은 삶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을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비가 냐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마태 7:24~25)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 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 드는 사람이 적다." 고 친절하게 어떤 길이 옳은 길이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 자신을 죽여서 보여주셨습니다. 

좁은 길이 절망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보여주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걷던 그 길은 절망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자 절망의 길에서 희망의 길로 바뀌었습니다. 두 제자는 자신이 가고자 했던 길에서 돌이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들의 경험을 전파합니다. 

지금 내 삶은 바른 길로 가고 있습니까? 잘 모르신다고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해 보십시요. 예수님께서 하신 일도 모르겠다고요?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묻히셨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 오셨습니다. 왜 다시 왔을까요? 아직도 세상의 유혹에서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오신 것입니다. 죽음에서도 승리하신 분이 나에게 바른 길을 보이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지금 힘드십니까? 걱정이 많으십니까? 

오늘 복음의 시작과 끝말이 어떤 말인지 기억하십니까?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 주겠다.”



지금의 걱정, 고통 그리고 안개속에 있는 것 같은 희미한 내 모습, 내 신앙이 오늘 말씀을 통해 희망과 기쁨, 축복이 넘치는 삶으로 변화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No comments: